아직까진 그의 작업이 표현의 측면에서는 하나로 온전히 묶이지 않고, 각 이미지 간의 거리감도 제각각이라 하나의 축을 만들어 읽으려는 시도가 비약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럼에도 그가 어떤 소재를 선택했고, 각각의 소재를 어떻게 표현하고자 했는지를 들여다보며, 일관된 정서를 느낄 수 있었다. ‘눈’과 ‘빛’이라는 소재는 ‘본다’는 행위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그의 페인팅은 편안한 상태의 ‘보기’가 아닌, 흐리거나, 한 겹 막이 씌워져 있거나, 눈부심 (소위 말하는 눈뽕) 이거나, 불이 꺼져 잔상만 남아있는 순간, 그러니까 보기를 방해하는 상황에서 ‘보기’를 이야기하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도 쳐다보기를 멈추지 않는 시선의 끝은 어디에 가닿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오랜 과거의 기억일 수도 있고, 방문해 보지 못한 세계의 풍경일 수도 있고, 스펙타클한 뉴스로 가득한 세상에서 무게감을 느끼지 못하는 일상의 어느 순간일 수도 있을 것이다. 마치 사진으로도 남아있지 않은 어릴 적 부모님의 자동차나, 죽음을 상상케 했던 타국의 자연, 묻지마 살인사건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했던 어느 날의 한가로운 창밖 풍경처럼 말이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각각의 그림들이 표현된 방식은 굉장히 다르다. ‘촛불’과 ‘꺼진 초’의 경우 흑백의 톤으로 간결한 윤곽만이 강조되면서 감광되어 남은 이미지와 같은 인상, 사진의 성격이 강조된다. 리히터의 그림들이 연상되면서 그와 같은 미술사적인 맥락에서 읽어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점에서는 상징이나 기호로 읽히기도 한다. ‘촛불’과 ‘꺼진 초’가 같은 소재를 공유한다는 점에서는 묶일 수 있으나 사실 그 둘도 굉장히 다르다. 어찌 보면 캔버스는 분명 입체이지만 평면으로 인식하기로 합의된 지지체이다. 그 때문에 육면체의 비단은 상대적으로 연약한 물질임에도 불구하고 캔버스보다 더 확실한 부피감을 드러낸다. 또한 캔버스 위에 그려진 ‘꺼진 초’는 ‘그림이 벽에 걸려있다’는 인상을 준다면 ‘촛불’은 ‘이미지가 부유하고있다’는 인상을 주면서 역전된 힘의 방향을 느끼게 한다. ‘찍어낸’ 것 같은 모노톤과 여러 번의 붓질을 통해 ‘쌓아 올린’ 것 같은 톤도 방향의 차이를 느끼는 데에 한몫하고 있다.
때문에 ‘꺼진 초’가 ‘촛불’보다는 ‘회화적’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이 또한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으로 표현적인 부분은 ‘구형 아반떼’와 두 개의 ‘Twin Fantasy’에서 더 두드러지며, ‘가려진 눈’에서는 오직 표현이 강조된다. ‘구형 아반떼’는 재현적이지만 작은 붓 터치로 자국을 남기며 표현되었다는 점, 수평 수직을 딱 맞추는 일종의 ‘증명사진’ 같은 화면이거나, 45 도 각도의 ‘제품 사진’ 같은 화면이 아니라는 점에서도 모호한 성격을 갖는다. 사진보다는 일반적인 성인의 시야에서 바라본 차량 전조등 같아서 인간적인 시야를 연상시킨다. ‘Twin Fantasy’의 경우 인간의 눈으로는 제대로 관찰할 수 없는 점멸의 순간 빛 번짐이라는 소재를 재현하고 있어 조금 더 사진의 성격을 갖지만, 자국을 남기는 표현이 그 관계성을 약화한다. 더불어‘구형 아반떼’와 대각선으로 걸린 두 개의 ‘Twin Fantasy’의 디스플레이는 각각의 그림보다는 서로의 관계를 강화하면서 어떠한 서사를 상상하게 만들고, 이는 ‘부모님이 예전에 운전하시던 자동차의 모델’이라는 작가의 덧붙임, 그리고 반대편에 걸려있는 ‘가려진 눈’과 조응하며 ‘기억’이라는 정서적인 이야기를 기대하게 만든다.
‘가려진 눈’이 표현된 양상은 앞서 말한 그림 중에 가장 다르다. 그의 작업을 하나의 맥락으로 묶는 과정에서 해당 그림이 겉돌 수 있는 위험성이 있지만, 그 반대로 좀 더 깊은 이야기로 진입할 수 있게 도와주는 표지의 가능성을 갖고 있다고도 생각된다. ‘가려진 눈’을 제외한 나머지의 그림들은 대상과 어느 정도 거리감을 갖고 있다. 물론 거리감은 각기 다르지만, 여전히 외부에서 그것을 바라보는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면, ‘가려진 눈’에서는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안개나 바람처럼 대상 내부에 이미 들어가 있는 인상을 준다. 이때부터는 그의 그림들이 단순히 사진과 회화라는 매체에 대해서 혹은 바니타스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확신을 준다. 무언가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열의와 욕망을 감지한다. 그 눈빛이 닿는 곳이 궁금해진다. 그러나 만약 이것이 좀 더 매체에 대한 탐구나 미술사의 맥락을 가져오고자 하는 시도가 중요한 작업이라면, 비단이라는 물성, 아크릴과 먹이라는 재료에 대한 탐구와 더불어 화면 그 자체에 집중하는 방향으로 작업이 전개될 수도 있겠다고도 예상해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해보고자 노력하는 시도를 해오고 있다고 느꼈는데, 두개의 관심사를 하나의 맥락으로 엮어 보여줄 수도 있을 것이다. 사진이라는 매체를 떠올리게 하는 그의 그림들이 개인의 이야기(기억이나 일상과 같은 키워드)의 성질과 어느 정도 공유하는 특성이 있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졸업 전시를 앞두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니 앞으로의 작업 전개가 궁금해진다. 무엇이든 좋을 것 같다.
임 이랑
가려진 눈, 50x50cm, 나무 위에 면천 위에 비단에 아크릴, 2023
구형 아반떼, 58x54cm, 나무 위에 면천 위에 비단에 아크릴, 2023
Twin Fantasy, 45x45cm, 나무 위에 비단에 아크릴, 2023
Twin Fantasy, 45x45cm, 나무 위에 면천 위에 비단에 아크릴, 2023
꺼진 초, 65x52cm, 나무 위에 면천 위에 비단에 아크릴,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