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강 동호Before This River Becomes an Ocean2024백 승현새 몸과 거푸집2023임 이랑보는 것, 맺히는 것, 남는 것2024구 태승Knock on Wood2023구 태승Twin Fantasy


“사실, 표현은 인식 그 이상의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인식한다는 것 그 이상이다; 적어도 분석적으로 인식하는 것 그 이상이다: 다시 만드는 거다. 이는, 사물을 재현하는 게 아니라면: 적어도 무엇인가를 생산하는 거다, 인간에게 즐거움을 주는 대상을.”[1]



그림보다 먼저 이미지의 세계가 존재한다. 누군가는 빠르게 누군가는 느리게 이미지를 사유한다. 누군가는 이미지를 신뢰하고 누군가는 이미지를 의심한다. 누군가는 이미지로 인해 혼란에 빠지고 누군가는 이미지를 통해 이해에 가닿는다. 로버트 그레이브스의 시 「In Broken Images」는 창작에 두 가지 길이 있음을 이야기한다. 선명한 이미지로 향하는 길과 부서진 이미지로 향하는 길. 선명한 이미지를 가정하면 판단이 무뎌지고 부서진 이미지를 가정하면 감각이 날카로워진다. 이미지의 균열을 덮어 두려는 쪽과 파고들려는 쪽이 무한히 결집하는 곳에 그림은 나타난다. 화가는 다음과 같은 그림의 명령을 실천한다. 무엇에 대해서든 아직 말해지지 않은 것을 시작하라.

최이안(b.2000)의 그림은 선명한 이미지 속에 있기에 언제라도 흐려질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한다. 작가의 그림이 동력을 얻는 과정은 주로 우리에게 친숙한 동식물이라는 소재에 달라붙어 있는 관념을 비틀어 모순을 발생시키면서 이루어진다. 연약함과 위협감이 뒤섞이고 무해함과 섬뜩함이 공존하는 이러한 형식은 의미상의 전진과 후퇴를 동시에 만들어 내는 것으로서 사물의 온전함에 대한 작가의 무의식적인 저항이 시각화된 결과다. 외투를 껴입은 기호들은 그 자체로 불가해한 불안을 가시화하며 재현의 원환적인 순환 구조를 벗어난다. 그림 안에서 형태들, 곧 단어들은 직관적으로 서로 어울리기보다는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접합하거나 분리되면서 시적인 긴장감을 형성한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침묵에 빠진 도상들은 미완의 형상이 되기를 자처하며 비언어적인 감정을 불수의적으로 환기한다. 작품마다 하나의 수사법이 필요하다는 듯이 최이안의 그림은 각각이 생경한 관점과 특성을 드러낸다. 마치 그렇게 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주장하려는 것처럼 주어진 수단들을 낯설게 살펴보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이다.

구태승(b.1998)의 작업은 부서진 이미지를 수집하기에 우연함을 붙잡아 두기 위한 강도 높은 성실함과 정밀함을 요구한다. 얼룩에 대한 작가의 관심이 목재의 주름과 상처를 모방하는 일에서 출발하였다는 점에 주목하자. 그려진 것과 보이는 것이 포개어진 회화의 레이어는 아이러니의 어원인 에이로네이아(εἰρωνεία)가 변장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음을 상기하게 한다. 작품에는 물감이 쌓이고 지워지는 자리마다 흔적이 아닌 무언가를 찾고자 했던 화가의 시선이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다. 무의지적 기억이 견인하는 그림의 표면은 태양의 흑점이나 회전하는 목성의 무늬를 닮아 있기도 하고 풍경과 신체의 일부를 넌지시 암시하기도 한다. 합판이 제작되는 방식을 참조하는 근래의 연작에서는 물감층과 그림층의 경계를 재료로 삼아 실재하지 않는 원본에 먼지와 자국을 덧입힌다. 구태승의 그리기는 우리의 눈을 속이는 데 그치지 않고 현실보다 더 실제적인 허구를 제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비록 미적 행위의 무용함을 넘어서려고 하는 시도가 불가능성을 마주한다고 해도 관조를 허용하는 그림들의 양태를 깊이 들여다볼 때면 단순한 외연이 새로운 인상을 안겨 준다는 것을 이내 알아차리게 된다.

괴물이 살고 있다고 전해지는 네스호에는 최근까지도 첨단 장비와 수백 명의 대원들이 투입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여전히 사람들은 개기일식이 연출하는 신비로운 현상들을 지켜보며 옛날 옛적 불길한 미신을 머릿속으로 떠올린다. 최이안과 구태승의 이인전 《Before This River Becomes an Ocean[2]》(2025)는 과학적 합리성으로 설명되지 않는 믿음의 체계를 조명하며 이미지에 대한 충실성이 전개되는 일련의 주체적인 입장들을 탐색한다. 조지 마이클의 노래 「Faith」의 화자는 연인을 향한 마음에 스스로를 내맡기려고 하지만 조금 더 분명한 확신에 이르기 위해 내면을 점검한다. 감당할 수 없는 것을 계속하겠다는 결심은 사랑이라는 변화가 삶을 전면적으로 재배치하기 전에, “강이 바다가 되기 전에” 공언되어야 할 것이다. 예술의 영역에서도 신념이 시험대에 오르는 일은 피할 수 없이 강제된다. 캔버스에 자신이 바라본 것을 결연히 옮겨 놓는 화가의 시점을 따라가다 보면 허상이라고 단언할 수 없는 견고한 환영을 경험하게 된다. 최이안이 시시각각으로 불협하는 이미지를 긍정하기로 결정한다면 구태승은 이미지를 명명할 수 없는 무력감을 능동적인 계기로 전환하는 데 성공한다. 작품을 창안하는 일은 미래의 질서를 선택하는 일이라고 퐁주는 말한 바 있다.[3] 두 사람이 각자의 미래를 그려 보이는 이번 전시가 일상과 약간은 다른 질서 속에 머무를 수 있기를 희망한다.




강동호

[1] 프랑시스 퐁주, 『프로엠』, 지식을만드는지식
[2] 조지 마이클의 노래 「Faith」.
[3] 같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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